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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하며...

3. Letters/마음의 소리

by Andrea. 2020. 5. 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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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1.8

 

3년의 여정이 끝났다.
내 삶에 무엇인가 끝을 고대하며 그렇게 애타게 시간이 흘러가길 기대했던 시기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시간도 그런 순간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끝이난 이 시점에 3년 전 2013년 6월의 인천 공항, 혼자 탑승구에 올라서며 했던 다짐과 당시의 목표들을 회상해 본다. 하늘에서 내려본 작아져 가던 고국땅, 많은 것을 잠시 그곳에 내려두고 새롭게 채울 것들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이탈리아로 향했었다.

모든 다리를 끊어 놓고

그렇게 한국을 떠나던 날 내 휴대폰에는 오직 가족의 연락처만 남겨져 있었다.
당시에 이탈리아에 나와서 한국의 있는 사람들과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하는 물음에 이런 저런 세상 살기 각팍하다는 푸념이나 하던지, 바쁜 지인들 귀찮게나 할 것 같아 아예 꿈또 꾸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였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고 보니 드는 생각은 힘든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지인들과 함께 세월을 공유하는 것 자체로 삶의 큰 의미가 있고 그것이 곧 삶이라는 것.

그리고 블로그 몸집을 키워가는 와중, 비록 얼굴을 모르더라도 온라인에서나 함께 한지 3년이 넘은 이웃분들도 있고,,, 이런 일련의 일들이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떻게 앞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이였다가 긴 세월이 지나서 처음의 생각이 맞았던 것도 있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떻게 삶이 전개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것들이다.

어찌됐든 3년이란 시간은 3년 만에 갑자기 연락하기에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시간이다.

1년의 기다림

이탈리아에서의 삶에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 단 하나를 뽑으라면 처음 도착하고 입학을 하며 원하는 교수의 코스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네리라는 본인 설계 담당 교수만을 바라보고 오른 유학길이 였다. 밀라노 공대로 유학 즉 이탈리아로의 유학을 결정한 모든 것의 시작은 네리 교수가 밀라노 공대에 재직 중이라는 사실 뿐만이였다.

하지만 밀라노 공대 석사 시스템이 표면상으로는 1년씩 돌아가지만 논문을 2년간 쓰기 때문에 사실상 한 교수 아래에서는 2년을 함꼐 가야했고 본인이 입학하는 당시 네리 교수는 당시 논문을 함꼐 하는 제자들과 2년 째에 있어서 본인은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였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 땅을 밟은 이유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알아보고 알아보고 그것이 진짜 사실임을 알고 이 고난을 뚫기 위해서는 그 당사자와 만나서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를 해보는 길 뿐이였다.

본인 상황을 메일로 설명해 보내고 그녀와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때 처음 선생님과 만나던 날의 떨림과 떨려서 말을 버벅 거리던 순간이 생생하다. 네리 교수를 처음 대면하고 어떻게 자신을 찾아 이 나라까지 오게 되었는지 긴 스토리를 듣고 싶어 했고, 이어 학과장님을 호출해 가능한 방법이 없는지 방법을 모색하던 두 분.

대안은 몇가지가 있었다.
첫째, 자신이 추천해주는 다른 교수들에게 배우는 것. 둘째는 1년 어학을 하다 재입학. 셋째 1년 유급을 하고 유급 기간 동안 나머지 선택과목들 모두 수강하기.

배신하지 않았던 내 삶의 결단들

당시에 생각하길 다른 수업을 듣는 것은 무의미했다.
취업을 미루고 석사를 학기로 한 것, 해외로 유학 온 것, 밀라노 공대로 온 것 등 모든 것이 오로지 한가지 이유였기 때문이였다. 그것을 거스르는 선택은 돈과 시간 들여 이곳에 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였다.

참 그때 고민의 시간은 괴로웠다. 한국에 몇몇 분에게 조언을 들어야 할까 참 고민을 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될지 모를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였다. 그때 내린 결론은 어찌되었든 내 삶의 문제이고, 결국 결정해야 하는 사람도 나 본인이였다는 것. 온전히 내 자신을 믿고 내린 선택일 때 훗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소신있는 삶을 경험으로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때 결단을 하길 솔직히 말해 50% 확신과 50%의 불확신이였다. 50%의 불확신함은 귀국시 나이의 숫자가 바뀌고 그로 인해 취업까지 얽힌 문제, 시간과 돈 문제 그리고 그것들을 희생했을 때 보장되는 미래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50%의 확신은 지금까지 내 삶의 행로에 어떤 중대한 결단을 해야했을 때 지금까지 내 자신을 믿고 따랐던 결단들에 의한 결과가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는 내 스스로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 것이였다.

세월이 지나 그 결단으로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끝을 봐서야 잘한 선택이였는지 못난 선택이였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와 회고하길 당연한 선택이였으면서도 잘 했다는 생각이다. 아마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이 순간 후회로 보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새로운 선생님들과 함께 한 2년의 건축 공부

한국에서 건축학 5년을 전공하며 그래도 조금은 건축을 안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본인이 부족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에 와서 배우는 새로운 것들에 비해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의 확인과 그것들을 더욱 두텁게 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였다.

이곳에서 배우는 기간 동안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빙산의 일각 그것도 매우 일부분에 불과해던 것을 깨달아 가며 점점 건축 공부가 심연을 향하고 있을 때 늘 책상에 앉아 혼자 책과 도면들과 씨름하고 있을 때 내 책상 위서 함께 했던 수많은 프로젝트들과 글들, 도면들...그들 하나 하나가 설레는 만남이였다. 그것들과의 만남을 나는 매일 밤 나를 찾아온 요정들이라 부른다. 도서관 책상에서 찾은 오래된 도면, 우연히 뒤적이다 발견하는 사실들 모든 것이 내겐 마법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였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꿈은 건축가였고, 건축을 하는 것이 꿈이라면 올바른 건축, 제대로 된 건축을 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하며 내가 투자하는 시간과 그외의 사항들 그리고 내가 배우는 것의 진정성은 나의 꿈이자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물음과 결부되기 일쑤였고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삼위일체로 언제나 나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행복한 공부를 하며 한주에 한번 교수님을 만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던 가르침이 있었다. 그것들이 지난 2년의 시간 또한 나를 성장시키고 그래서 행복에 겨운 시간들이였다. 네리교수 외에도 다양한 교수들을 만나면서 본인이 보기에 인성이 부족한 교수들도 있었고,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 교수도 만났다.

그럴수록 나를 매번 마주할 때 마다 내 두눈을 깊이 바라보며 내가 내뱉는 부족한 이탈리아어 표현을 그 넘어에 있는 진실한 의도를 보고 들으려 노력을 기울여 주신 것을 안다. 그 분의 깊은 인품과 동양 사상에서나 그리는 참 스승의 면모를 갖춘 분이셨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고 그런 분께 내가 배우고자 했던 건축을 배울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을.

함께 가는 길

두려운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이 길이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일 경우이다.
다행히도 이 길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선배들은 건축가로 뜻을 펼치고 있고 몇몇 후배들은 열심히 쫒아가고 있다.

이 먼곳에 와 나를 찾던 사람들도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였고, 건축 때문에 먼 여행을 온 사람들이였다. 그런이들과의 대화는 늘 건축으로 시작되고 건축으로 끝났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러 유학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런 대화로 만남을 이끌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언젠가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이곳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함께 건축공부를 하고 같이 건축얘기를 할 동무가 없어서이지 단순히 한국의 정든 사람들이 그립고 한국밥이 그리울 일은 없을 것이라는.
돌이켜 보면 이 길은 외롭지 않은 길인 것 같다.

늘 옆을 지켜준 여자 친구

배우자를 만난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와 비슷한 또다른 나를 만나기를 바래왔다. 세상의 부정들과 부딛히더라도 올바른 가치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나와는 다른 또다른 자아. 그런 소신있는 삶을 살아가는 다른이, 그런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면 모든 내 삶을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나의 인격적으로 부족했던 면모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들이 되었다. 평생 함께 하는 동안 인생의 동반자이면서도 내 평생의 도덕적 채찍질, 인격적인 부분을 늘 피드백 할 수 있게 만드는 대상, 그런 존중할만한 인격체를 가진 인연을 만난 것이 무엇보다 지난 3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또다른 가족

그런 딸이 자란 배경에는 그런 가족이 있었고, 그들은 3년동안 처음 만난 그날부터 올해 초 연휴를 보내는 순간까지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대해주었다.

처음 나를 만난 날부터 엊그제까지 그분들은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나역시 여자친구의 가족이 아닌, 아내의 가족도 아닌 나의 또다른 가족이 이탈리아에 생긴 것이였다. 이탈리아의 평범한 가정들, 다른 가족들이 보두 그렇지 않다는 현실을 알아가며 이 분들을 만나게 된 이 귀한 인연이 유학 기간동안 건축공부와 함께 나를 지탱했던 또다른 축이 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건축공부와 병행된 또다른 인생 공부였음을.

이유없는 희생

한 가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유없는 사랑과 지원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짧을 것이라 생각했던 유학이 길어지고 긴 시간 떨어져 아낌없는 사랑과 지원을 해준 가족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다. 세상 사람들이 어느 가족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을 향한 희생을 이유 없는 희생이라 당연한 듯 말하지만 그것은 분명놀라운 일이다. 졸업은 내게 개인적인 영광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주었던 가족이라는 힘은 기적 같은 것이다. 아무런 댓가 없는 지원과 사랑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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